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예스24


땅의 주인인지, 아니면 주인의 명을 받아 감독하러 나온 부잣집 마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갓을 빗겨쓰고, 비스듬히 누워 담뱃대를 빨고 있는 모습은 다소 얄밉기까지 합니다. 남들이 일하면 같이 도와주던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쉬든가. 그러나 그가 저런 모습으로 그림에 등장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상당수의 지주들이 소작농들과 병작반수라는 형태의 계약을 맺었습니다. 지주의 땅을 소작농이 농사지으면 그 수확량의 절반을 주인에게 바쳐야 한다는 내용이죠. 만약 소작농들이 타작을 마친 후 곡식을 빼돌리게 되면 주인이 가져야 하는 양도 결국 줄어들게 되겠죠.


도화서는 조선시대에 나라에 필요한 그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화원이란 그 중에서도 전문화가를 뜻합니다. 그래서 영조 대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로 뽑히게 되었고, 나중에는 정조의 초상화도 그리게 되는 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정조 시기 김홍도는 궁중의 모든 중요한 그림 일에는 책임자로서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 점은 정조 대왕의 다음 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와중에 일본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친일적 개혁을 이루게 되는데,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그러나 경신환국에 의하여 1680년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 정권이 다시 수립되면서 붕당 사이의 대립양상은 크게 달라져갔다. 즉 다시 집권한 서인은 철저한 탄압으로 남인의 재기를 막았다.


남녀의 성기는 더 과감하고 생동감 있으며 과장되게 표현했기 때문에 적나라함에 있어서는 한국이든 중국이든 일본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춘화와 금병매는 당시 중국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고 명나라 때에는 춘화가 크게 유행하며 종이에 그린 것뿐만 아니라 부채, 식기, 그릇, 도자기 등에도 소설 금병매의 장면을 그려 넣기도 했다고 합니다. 선원전(璿源殿)은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 지내던 진전(眞殿)이었다. 선원전은 고종 대 경복궁 중건 당시 세워졌으며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직후 경복궁의 소유가 조선총독부로 넘어가면서, 일제는 선원전 주변의 부속 건물과 행각들을 대부분 철거했다.


이밖에도 이른바 커닝페이퍼를 콧구멍에 넣거나 종이로 만든 속옷에 글을 써서 입거나 아주 작은 책을 만들어 옷속에 숨겨 들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답니다. 5살 때 과거공부를 시작한다면 무려 30년 이상 머리를 싸매야 겨우 대과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연산군은 고문행위에 대한 전례를 찾아서 악형을 가하여 폭군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의 치세 중에 행해진 고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압슬, 포락(炮烙, 단근질하기), 물구나무 후 물고문, 착흉(斮胸, 가슴을 구타), 주리 틀기, 불판을 걷게 하기, 능지처사, 촌참(寸斬, 토막토막 자르기) 등의 형벌이 있었다.


이때 2명은 총에, 2명은 창에찔려 죽고, 체포되어 형벌을 받아 5명이 죽었다. 9명이 죽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좌병사도 부사도 이를 보고하지 않았고,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박이도에 의해 뒤늦게 보고되었다. 속현은 헌양현(巘陽縣), 동래현(東萊縣), 기장현(機張縣)이 있었고, 모두 1018년(고려 현종 9년)에 울주의 속현이 되었다.


하지만 황진이가 지방 군수급을 꼬셔가며 놀 때 차원이 다른 왕손과 정승급의 공신들과 노는 기생이 있었으니 바로 '초요갱'입니다. '허리가 개미처럼 가는 초나라 미인의 경쾌함'을 뜻하는 초요갱은 먼저 세종의 7번째 아들 평원대군의 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평원대군은 일찍 절명하게 되고 이를 놓칠 세라 배다른 형제였던 화의군(이영)과 계양군(이증) 사이에서 놀아나게 되죠.


누르하치가 명나라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공격하자 수세에 몰린 명은 조선에 소총수 7000명을 지원하라고 요구하였고 누르하치는 파병하지 말라고 조선 조정에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광해군은 명에 원군을 보내되 싸움이 시작될 때 항복해 조선이 부득이 파병한 실정을 설명하게끔 하였다는 야사가 있으나 이는 파병된 인원의 80%가 전사한 뒤에 항복했다고 전해진다. 간의는 천문대에 설치해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관측 기기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한국 천문연구원에서 만들고 있는 GMT(대형 지상 망원경)에 대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의는 망원경과 비슷하게 적도좌표로 관측할 수 있고 지평좌표로도 관측할 수 있는 두 개의 망원경을 하나에 붙여 놓았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한을 품고 사망하였으므로 단종은 무속의 신의 한 사람으로 모셔졌다. 영월군 군내면 영흥리(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세워진 단종의 사당 영모전 외에도 단종은 무속의 신 중 왕신의 한 사람으로 모셔졌다. 영흥11리 마을 서낭당과 양주 신혈면(현 서울 은평구) 지역의 일부 무속인은 단종을 무속의 신으로 모셨다. 천주교에 대해 유연한 입장을 표방했던 선왕 정조조차 1788년에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했었기[69][70] 때문에 노론 벽파에게는 거칠것이 없었다. 참, 맨 오른쪽 구석에 앉아 있는 사람의 손 모양이 잘못 그려져 있는데, 혹시 알고 있었나요? 김홍도의 재치 있는 장난기를 엿볼 수 있는데, 기회가 되면 다른 그림에서도 찾아보세요.


여전히 애정소설에는 가부장적 질서와 남성적인 시선이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이 변화된 현실을 반영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양반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신분적, 성적 질서의 재편이 소설을 통해서라도 가능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또 하나의 낭만적 환상을 생산하는 일일 뿐 애정소설의 실제를 이해하는 일은 아니지 않을까? 말하자면 애정소설은 당대 즐겨 읽히던 여러 소설 유형들 중 하나이며, 여타 유형들에 비해 주변적인 가치, 상상적이고 낭만적인 세계의 가치를 부각시키면서 당대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영역을 초점화시켰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당대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적 성격을 가졌다거나 현실전복적인 기능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쯤 되면 무엇이 현대에 사는 우리들의 의식에 더 가까운가를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19세기 작품인 『절화기담』과 『포의교집』에는 좀 더 적극적이고 과감한 새로운 유형의 여성주인공이 등장하고 있지만 이 역시 19세기적인 것으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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